순간들 by 페이퍼백

순전히 직감으로 dvd를 산다. 감독과 배우에 대해서 모르는 영화는 제목과 내용을 보고 결정한다. 한 번 눈에 들어온 영화들은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 결국 보게 된다. 요즘 나는 비디오샵에서 비디오를 빌리듯 언제 구입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dvd들을 둘러보면 보고 싶은 영화들을 고른다. 지난 몇 달간 할인행사로 구입한 dvd 대부분은 일본 영화 박스 세트였다. 보지 못한 영화들이 전부고 이 영화들에 대한 정보나 지식도 없다. 그렇게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과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봤다. <올웨이즈>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근대사의 노스탤지어에 기대한 완전 신파다. 영화의 엔딩에 가면 도코 타워 홍보 영화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런 영화에 절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한없이 저주를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올웨이즈>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흘렀고 또 감동적이었다. 원래 나는 정말 이런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언뜻 보면 완전 막장 드라마 소재다. 그런데 참 교묘하게 욕망을 감췄다. 이런 영화도 내가 참 싫어하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영화가 감동적이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보다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12월의 첫날은 서울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 <크리스마스 캐럴>, <어떤 방문>을 보러 압구정cgv를 찾는다. 영화만 보고 내려올 예정이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h와 볼 예정이다.

요즘 이글루스에 머라이어 캐리에 대해서 글을 쓰지 않았다. 이유는 자꾸 감정적인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머라이어 캐리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음악을 들고 나와도 전혀 변하지 않는 팬들과 편견에 대해서 실망했다. 팬들은 서슴없이 <회고록> 영화를 접어야 한다고 말한다. 참 어이없다. 차트 성적이 나쁜 건 사실이다. 팬들은 Obsessed의 성공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Obsessed는 성공했다. 머라이어 캐리를 불신하면서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참으로 어리석고 이기적이다. <회고록> 앨범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은 너무 많다. 여전히 이 앨범은 들을 수 밖에 없다. <회고록>은 쉽게 듣고 버리는 일회성 음악이 아니다. <해방>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앨범의 커버에 3명의 머라이어 캐리가 있는 건 말 그대로 해방의 3번째 속편이라는 뜻이다. 팬들은 음악을 들을 줄도 모르고 읽을 줄도 모른다. 그러니 차트나 머라이어 캐리의 몸매를 가지고 왈가왈부한다. 머라이어 캐리가 영화를 찍고 향수를 만들며 자신의 삶을 확장해나갈 때 팬들은 고작 가수 머라이어 캐리만이 전부라고 말한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라. 머라이어 캐리에겐 그 모두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또는 수많은 팬들이 보고 느끼고 욕망하는 머라이어 캐리에 대한 것은 일부이면서 동시에 머라이어 캐리의 전부다. 총체적인 머라이어 캐리를 수용할 수 있을까. 내가 볼 땐 이제 세상은 더이상 머라이어 캐리를 끌어안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뤘다. 머라이어 캐리는 나아가려는데 고작 사람들은 과거의 일부만 가지고 현재의 머라이어 캐리에 대해서 비난하고 평가한다. 머라이어 캐리를 궁지로 몰고 있는 것은 결국 팬들의 찌질한 사랑이다. 또는 잘못된 안티들의 집착이다. 그럼에도 이 말을 꼭 해야겠다. 나는 요즘 [미미의 해방], [E=MC2], [불완전한 천사의 회고록] 앨범을 80분에 담을 수 있는 한 장의 앨범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세 앨범은 올드 스쿨한 무드로 한 장의 앨범으로 만들 수 있다. 머라이어 캐리가 무엇으로부터 해방되었는지 이 앨범들은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느끼는 것은 전적으로 팬들의 몫이다. 그러니 부질없는 가십거리에 그만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 왜 즐길 수 있는 현재의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을 버려두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 팬들은 머라이어 캐리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 사랑은 무엇인가. 나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숀 펜의 하비 밀크 <밀크> by 페이퍼백

거스 반 산트의 <밀크>를 봤다. 숀 펜을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솔직히 의아했다. <더 레슬러>의 미키 루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크> 보며 안다. 숀 펜이 정말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는 것을. <밀크>에서 내가 본 것은 하비 밀크이지 숀 펜이 아니었다. <더 레슬러>에서 내가 본 것은 랜디가 아닌 미키 루크 자신이었다. 거스 반 산트는 죽음 3부작처럼 실존인물과 사건의 죽음처럼 <밀크>를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전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밀크>는 시작부터 죽음을 예고한 한 사내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하비 밀크는 쉰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그는 마흔 살이 되기 전 이미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있는 듯 보인다. 적어도 거스 반 산트의 <밀크>에서는 그렇다. 영화의 처음과 끝만 보자면 거스 반 산트의 개인적인 감상문에 가깝다. 하비 밀크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추적하는 거스 반 산트는 게이인 자신의 정체성의 우상으로 하비 밀크를 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팩트를 거슬러 다양한 해석을 덧붙이지 않았다. 론 하워드의 정치 스릴러 <프로스트 vs 닉슨>(2008)이나 올리버 스톤의 정치 영화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비 밀크에 대한 거스 반 산트의 예의이다. 국내 개봉이 왜 이렇게 늦어지는가 궁금한다면 영화를 보면 안다. 거스 반 산트의 <밀크>는 현 정권에서 상영될 수 없는 영화다. 하비 밀크의 총살로 인해 3만명 군중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을 때 그것을 용인할 수 있는 한국의 현 기득권자들이 과연 존재할까. 시대가 역행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영화 <밀크>는 게이 인권 운동가의 삶을 조명한 영화라서가 아니라 영화가 품고 있는 정치성 때문에 당분간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거스 반 산트의 <밀크>는 올해의 영화다. 지금 우리는 이 걸작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영화광의 입장에서도 이것은 불운한 사건이다. 어떻든 영호 <밀크>를 두려워할 한국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불행하다는 증거다.


하루를 살리는 일 by 페이퍼백

오늘은 아르노 데스플래생의 <나의 성생활>을 보러 서울에 올라갈 예정이었다. 새벽에 연달아서 3편의 영화 <500일의 여름>, <더 문>,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4>를 보고 자지 않았다면.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이불속에서 나왔는데 달콤한 꿈에 사로잡혀 눈뜨기 싫었다. 달콤한 것은 가질 수 있다는 묘한 믿음 안에서 그 어떤 것도 가지 못하는 상태일 때 가능하다. 꿈은 그래서 달콤했다. 창문을 여니 조용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은 물건너 간 것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게으름을 피우기에 좋은 그런 날이다. 조카가 부침개를 부쳤다고 부른다. 오랜 잠을 잤는지 약간의 두통이 생겼다. 그래서 조금 더 잤다. 방안은 암실처럼 어둡고 컴퓨터에서 흐르는 노래는 잠들기에 안성맞춤이다. 아트시네마를 생각하면 오늘 하루가 용서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시간 안에 살고 있다. 하루를 살리기 위해 늘 고민한다. 내게 주어진 볼품없는 것들안에서 마법을 바라며 오늘도 적당히 포기하고 또 욕심내서 선택했다. 하루가 끝이 나는 밤에 이르면 그 모든 이슈들은 무의미해져간다. 그러나 견고해지는 것은 어떻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천천히 이제 또 다른 영화를 선택해서 다른 세계에 빠질 것이다. 나는 이 겨울을 보내기 위해 준비한 영화들이 많다. 그 모든 영화들을 다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해야할 것이 있다는 건 절망적이지 않다는 신호다.

우정과 음악 <솔로이스트> by 페이퍼백

조 라이트의 <솔로이스트>는 쉽게 잡히지 않는 이야기의 영화다. '우정과 음악'을 소재로 한 드라마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베스트셀러 원작인 영화 치곤 전형적인 감동을 이끌어내는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시무스 맥가비의 기막힌 촬영과 다리오 마리아넬리의 음악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나도 뚜렷한 인상을 받지 못한다. 조 라이트가 <LA 타임즈>의 기자 스티브 로페즈의 칼럼을 통해 무엇을 그리고자 했는지 영화의 엔딩에 가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나레이션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우리는 가끔 살면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확신감에 들뜰 때가 있다. 그런 만남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된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시도들은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저널리스트 스티브와 줄리어드 음대를 중퇴한 천재 첼리스트 나다니엘의 경우도 그렇다. 정신분열로 사회가 만든 시스템에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는 불운한 나다니엘은 쇼핑카트에 잡동사니를 싣고 LA 거리에서 자는 홈리스로 오늘을 살아간다. 스티브는 그를 다시 사회로 돌아와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하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간다. 나다니엘이 가진 불완전함을 치유하고 극복시키고자 하면 할수록 그는 거리로 돌아갈 뿐이다.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다나니엘은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려는 스티브를 폭행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곧 여느 만남처럼 끝이 날 위기에 서있다. 스티브는 이혼한 전처 메리(캐서린 키너)를 찾아가 '그저 친구가 되어주라'는 충고를 받는다.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 부질없이 깨어지는 믿음 앞에서 다시 용기를 내기란 쉽지 않다. 다나니엘과 같은 불완전한 인물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다른 용기와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스티브 로페즈 역시 자신이 이 만남을 통해 그에게 도움을 줬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만나기 쉬운 상대가 아닌 상대가 원하는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되기란 쉽지 않다. <솔로이스트>의 제목처럼 우리는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혼자서 연주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우정이란 그런 면에서 강요가 아닌 동행이 되어야 한다고 <솔로이스트>는 조용히 조언한다. 영화적으로 완성도 높은 드라마는 아니지만 조 라이트가 영화의 전반에 걸쳐서 보여지는 스티브와 나다니엘의 만남과 실패 속에서 우정과 믿음을 지키는 일이 무엇인가 질문하게 만드는 점에서 이 영화의 특별한 지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제이미 폭스의 연기를 볼 수 있으니 다행스럽지 않은가.


2009 스페이스 오딧세이 <더 문> by 페이퍼백

던컨 존스의 미스터리 SF '드라마' <더 문>을 보고 나면 바로 "<2009 스페이스 오딧세이>네"라고 말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2009년 선댄스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후 그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당연하다. 이건 SF장르의 절대적인 고전이자 걸작이라 할 수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의 인공지능 컴퓨터 '할' 캐릭터를 역이용한 '커티'가 등장하고 '커티'의 목소리는 케빈 스페이시가 맡았고 거기에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1979)를 부분 인용하고 <블레이드 러너>(1982)의 복제인간의 '인간성'의 테마를 엮었다. 잠깐 사족이지만 던컨 존스의 출생의 이력도 대단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데이빗 보위란다. 그런 사족이 없더라도 영화 <더 문>은 올해의 SF로 불릴만하다. 시시한 할리웃 SF액션스릴러 <써로게이트>나 <게이머>보다 훨씬 서스펜스하며 올해의 SF라 평가받는 <디스트릭트 9>보다 간결하고 재치있다. 그러나 외계인으로 변한 주인공의 결말 지점에서 제기한 질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공통된 화두다. <더 문>의 수수께끼는 또다른 나를 내가 목격했을 때다. 호러였다면 다중인격을 내세웠겠지만 (정말 그랬다면 <더 문>에 저주를 퍼붓었을 것이다!) <더 문>은 우아하게 SF장르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했다. 물론 그건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에서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그 스스로 의문에 빠지는 '기억력'의 문제다. 불완전한 기억력을 가진 인간을 닮은 복제인간이 인간을 대신해 지구를 살리기 위해 달에서 죽도록 고생한다면 복제되지 않은 진짜 인간인 우리는 이 복제 인간의 인권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물론 영화는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3년 동안 혼자서 달에서 지구에 보낼 에너지를 조달하느라 바쁜 복제 인간 샘 벨은 정확하게 3년 일하고 나면 죽게 된다. 슬픈 운명이다. 임무는 정해져 있고 기간도 정해져 있다. 오로지 진짜 인간 샘 벨의 기억력만이 그를 달에서 버티게 만든다. 진짜 인간과 똑같은 감정을 지녔다. 물론 <A.I.>나 <월.E>도 인간보다 더 착한 로봇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결국 SF영화가 말하는 인간성이란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뜻하는 것 아닌가. 기억력은 조작될 수 있다. 기계는 데이터를 통해 기억력을 가졌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제 인간에게 임무가 아닌 감정을 심어줄 때 진짜 인간처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부터 딜레마가 생겨난다. 진짜 인간이 복제 인간보다 못하다면 진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결국 이것은 윤리의 문제이며 태도에 관한 질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또다른 샘 벨이 지구에 도착하게 된다면 그때부터 인간 사회는 문제가 생겨난다. 지구와 지구인이 살자고 만들어낸 비극이다. 그러니 이 생존의 문제에서 우리는 어떤 상상을 하며 미래를 꿈꿔야 할까. 대체 에너지도 시급하고 윤리의 문제도 시급하다. 위기는 점점 더 조여오는데 <더 문>의 복제 인간 샘 벨은 인간보다 더 순수하게 지구와 인간 삶을 동경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탄생 이유에 대해 인식하고 나면 진짜 인간에게 봉기를 일으킬까. 그 다음에 우리가 익히 봐왔던 SF 장르 영화의 역사처럼 인간 대 기계의 전쟁이 되풀이될까. 달에 사는 인공지능 컴퓨터 '커티'가 돕는 것은 진짜 인간 샘 벨일까. 아니면 자신과 같이 프로그래밍된 처지의 존재를 동정하는 것일까. <더 문>에서 가장 신선한 것은 어떻든 '할'의 캐릭터를 반전시킨 '커티'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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